그는 정말로 낙관 주의자다

 

 

2017.09.11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빛바랜 스케치북을 챙겨들었다. 뭉툭한 크레파스가 금방이라도 묻어 나올 것만 같은 그림이 찢긴 표지 대신 손에 맞닿는다.

사실 그림을 좋아하지는 않았다. 손에 무언가 묻어나고 꽤 세심한 집중력이 필요한 미술은 나에겐 고역인 일이다. 네가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미술과는 거리를 두었을 것 같다. 가끔, 아주 가끔 미술관을 지나치는 정도인 인연이었겠지.

잘 모르겠다. 손은 아직 깨끗한데 크레파스가 덕지덕지 묻은 것 마냥 어색했다.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*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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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때도 해는 뜨거웠다. 한 손에 든 아이스크림이 끈적하게 손에 흘러내리던, 그런 더운 날이다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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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그래서 혼났다는 거야, 아니라는 거야?"

"멋대로 착각하지 마. 난 아무 말도 안 했어."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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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착각 안 하려고 묻는 거잖아."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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입을 다문 채 아이스크림을 반대 손으로 옮겨 잡았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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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애초에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으려고 했었다. 그냥 뭔갈 먹고 싶지 않았고, 찝찝했었으니까. 그런 내게 강제로 아이스크림을 들린 건 녀석이었다. 그런 주제에 자신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맨손과 함께 헥헥거린다.

 

"이거나 어떻게 해. 다 녹아."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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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네가 안 먹어서 그런 거지."

"안 먹고 싶었거든."

"아주 한마디도 안 지지."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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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질 이유가 없는 걸."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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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.  뭔가 의미 없는 미소가 다시 소년의 얼굴을 차지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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무엇이 그 소년에게 동정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나를 '구제'하고 싶은 듯했다. 그러니까.. 조금 미묘한 관계였다. 더 밑이 누구냐고 물을 것도 없이 비슷한 위치에서 손을 내밀어봤자 올라갈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.. 굳이 따지면 이율 없는 관계?

덤덤하게 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그 녀석에게 쥐여주고 손을 털었다.

 

"됐어, 그냥 너나 먹어."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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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그날 나와서 혼난 거야?"

"…굳이 답을 들어서 뭐 하게?"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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소년은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맞춰왔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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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내가 불렀던 거잖아. 그래서 혼난 거면 사과해야지."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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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…관심 꺼."

 

소년의 손에서까지 녹던 아이스크림이 아스팔트 위로 떨어진다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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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그래요, 그래."

 

"……."

 

"잘 가."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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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너도."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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의미 없는 인사와 의미 없는 웃음과 의미 없는 온도에 천천히 뒤돌아 걸었다.

잔잔했다. 착각할 수 있을 만한, 평소와 같은 날이다.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*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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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다. 그렇게 열심히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미술을 시작한 것도, 그러면서 훨씬 심하게 받은 질타를 참아낸 것도 그 녀석에 의한 일이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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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 세계는 분명히 바뀌었고 너는 그런 나를 보며 대리만족이라도 하는지 기뻐했다. 아니, 대리만족이 아닐지도 모른다. 진짜 나의 행복을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. 지금 내 심리도 괜한 나의 착각일지도 몰랐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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꽤 요란한 소리를 하고 지하철이 역을 지나친다. 반대쪽에 있는 지하철이라 탈 필요가 없었다. 종점으로 가려면 저쪽으로 가선 안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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스케치북이 든 면 가방을 팔에 걸고 두 손을 털어낸다. 끈적함이 가득한 손에서는 어렸을 때 많이 맡아봤던 아이스크림 냄새가 난다.

 

기다리고 있던 쪽에서 큰 소리와 함께 빛이 보였다.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*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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왜 그랬냐는 말을 들으면 잠시 멈칫하게 된다. 사실 항상 멍한 나는 이유를 미리 생각해두지 않았다. 하라고 시키는 대로 하고 감정을 죽인다. 태어나면서부터 배워왔던 게 그런 거였으니까 이미 익숙해진 버릇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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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왜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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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……."

​

- 왜 못 와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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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래서 소년과 하는 대화는 곤혹스럽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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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…못 가."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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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만나면 안 되는 거야, 네가 못 가는 거야?

 

마치 진심으로 궁금해 하는 듯한 듯한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들려온다.

 

"그림 그려."

​

- 그럼 어쩔 수 없지.

"끊어."

- 내가 갈게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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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……뭐?"

 

당황스럽고 곤혹스러운 일뿐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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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미 끊어진 핸드폰을 보다가 내려놓고선 다시 붓을 쥔다.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풍경화다. 한가지 특이점이라고 한다면 창문 하나 열지 않은 방에서 그린다는 점이지만. 서툰 붓질로 초록 산을 그리고 푸른 하늘을 칠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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착각할 수 있는, 꽤 괜찮은 느낌이다.

아직은 어색한 자취방에 띵동 하고 벨 소리가 울렸다. 곧 익숙해질 것 같다.

 

 

 

 

 

 

*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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창문 뒤는 새까맣게 칠해져있는 듯했다.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 밝은 지하철 안에서는 그 너머를 볼 수 없다. 원래 그랬다. 찬란히 빛나는 무대에선 우울한 객석을 볼 수 없다.

지방 쪽으로 가는 지하철이라 그런지 한가한 지하철 안은 적당히 따뜻하고, 적당히 조용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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스케치북을 꺼내들었다.

그림에 재능은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보면 고개를 끄덕일 만큼은 그릴 수 있었다.

그와 반대되는 서툰 그림이 가득 그려진 스케치북은 이미 너덜너덜하다. 무엇을 그렸는지 헷갈릴 만큼 지저분한 선과 채색은 어린아이를 연상시킨다.

네가 재활 치료를 받으며 처음 그린 그림이었다. 너의 방 구석에서 찾아낸 것이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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몇 장 넘기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. 단조로운 컬러링이 가다 뚝하고 멈춘다.

​

 

- 응.

"응."

​

- 왜 갑자기 전화야? 무슨 일 있어?

​

"…넌 왜 그림을 좋아해?"

​

- ……에……뜬금없네.

​

"그러게."

​

- ……음……. 부모님 대신에 키워주던 형이 미술을 엄청 좋아했거든. 그거 옆에서 보면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. 멋있었으니까.

"그렇네."

​

- 무섭게 왜 이래, 갑자기.

​

"그냥."

 

눈에 비치는 반대쪽 어둠이 차례로 침식해갔다.

 

- 무슨 일 없지? 괜찮지?

​

"괜찮아."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*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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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억이 나지 않았었다. 그랬었다.

기억이 떠오른 건 아주아주 오래된 일이다. 소년이 내게 다가오기 시작하고 내가 조금씩 마음을 열던 때에. 그러니까 내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,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버리기 전에.

사고가 있었다. 여느 때처럼 멍하게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오토바이에 치인 사고였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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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내가 유일한 피해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. 멍청한 일이다. 그렇다면 간단한 타박상으로 끝나지 않았을 텐데, 또 멍하게 말해주는 대로만 믿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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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때 나는 나의 세계랄 것도 없어서 다른 이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. 그래서 꽤 유명하던 미술 천재인 너를 알지 못했고, 그래서 너에 대한 사고 소식도 알지 못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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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를 밀쳐낸 건 너였고, 그 때문에 꿈을 잃은 것도 너였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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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의 착각이었다.

소년을 밑바닥으로 밀은 건 나였다.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*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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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람 하나 없는 지하철 안에 안내방송이 울렸다. 느릿느릿 일어서 지하철 문 앞에 섰다.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.

 

종점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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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이제 진짜 그림 그릴 거야. 끊어."

- 그래.

 

 

너는 나를 일으키면서 일어섰다. 나를 구제하면서 함께 용기를 얻고 다시 일어난듯싶다.

확실히 내 세계는 변했다. 너의 '내' 세계는 그렇다.

 

​

착각이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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너를 '구제'해준, '너의' 착각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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'나'는 하나도 괜찮지 않다. 굳게 속여오던 나는 너의 '나'였다. 후회하는 건 아니다. 착각이라도 너에게 필요하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.

 

하지만 이제 너는 진짜 괜찮아졌고, 나를 필요로 하지 않는 너의 세계를 만들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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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내일 봐.

"응, 내일 봐."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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헛웃음이 나온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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손이 끈적해지는 느낌이다. 아니, 나에게는 끈적했다. 보이지 않는 아이스크림이 뚝뚝 아스팔트 바닥에 흘러내린다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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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정말로 낙관 주의자다.
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.